• 항일계몽운동
  • 의병운동
  • 단지동맹
  • 하얼빈의거
  • 옥중투쟁과 재판
  • 순국
일본은 1907년 7월<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한국의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며 군대를 해산하는가 하면 산림과 광산 그리고
철도를 빼앗는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또 하나의 단계적 조치로 소위 ‘차관정비’ 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일제는 항일계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07년 7월 27일 신문법(新聞法)을 공포하여 언론, 출판의 검열을 강화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안중근은 고종황제가 퇴위되고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동지들과 함께 그에 대한 방책을 협의하였다. 안중근은 이 때 항일계몽운동의 적극적인 방략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독립전쟁전략’ 을 주장했으며 그 전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골자로 되어 있다.
  • 1. 일본제국주의는 그 팽창과정에서 5년 안으로 반드시 러시아, 청국, 미국의 3개국 중 어느나라와든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 2. 이러한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며 한국으로서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 3. 이 때에 만일 한국인이 미리 준비가 없다면 일본이 패전하여도 한국은 또다시 다른 외국 도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 4. 한국민족은 오늘로부터 의병을 계속 일으켜 큰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힘을 길러서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공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 5. 만약 큰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했다가 혹 패전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각국의 공론을 모아 독립을 보장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요지의 안중근의 독립전쟁전략은 1907년 당시 상황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국내의 의병운동은 현대식 병기의 절대부족과 의병들의 군사훈련 부족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중근은 국내에서의 항일 계몽운동을 중단하고 국내에서의 전략에 대한 한계점을 느끼고 의병부태를 창설하기 위해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톡을 향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안 의사의 나이 29세였다.
안중근은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의병조직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충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중근은 참모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왼쪽부터)안의사가 자주찾은 한인 집단거주지역 / 안의사가 국내진공작전시 넘나들던 핫산 부근의 두만강변 / 두만강변의 요충지인 회령(會寧)」
그 당시 나는 이런 논리를 밝혔다.
우리의 병력은 2~3백명밖에 안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백번 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 큰 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이 한번의 의거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한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번, 두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번, 그렇게 네번, 열번에 이르고 일백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 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안중근자서전중에서」
그 해 7월에 안중근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고을에서 일본 군경과 세차례의 교전끝에 5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회령으로 진격하여 일본 수비군을 격퇴하는 등 13일동안 30여차례 교전을 했는데, 안중근은 이때 잡은 포로들을 국제공법과 인도주의를 들어 석방하였으나, 의병들 중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이 작전은 정예 일본군들의 “토벌작전”에 밀려 고군분투했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부하들도 흩어져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장마속 산길을 헤맨끝에 한달 반 만에야 연해주 본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의병투쟁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시로 격려했다.
그 다음해 정월(기유년 1909년)엔치야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12명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이제까지 일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소.
생각건대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 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오”
라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두 사람은 제가끔 왼손 무명지를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 ‘대한독립’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 안중근, 「안응칠 역사」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취지문(趣旨文)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人種)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生民)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하였으면 좋은지 방법을 모르고
혹 왈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 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 하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2천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다만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會友)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하는 표(標)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지하(靑天白日之下)에 맹세하오니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아무쪼록 이전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하여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에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 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 안중근,「안응칠 역사」에서
의거의 순간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 응징하는 안중근 의거 장면도(박영선 화백)
오른쪽, 『도쿄일일신문』에 게재된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가 체포되는 장면을 그린 삽화
의거의 이유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조
  •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 10.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라
  • 「안응칠 역사」 중에 기술된 15개조의 「이토 히로부미 죄상」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은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한국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어서 흑백의 분명한 대조가 아무래도 수분 후면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집행을 언도하고 드디어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전옥형무소장, 소노키 통역, 기시다 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에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 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안의 최후가 일각일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언도 이후까지 안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간 묵도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그때의 감정이나 얼굴색은 흰옷과 어우러져 더욱 창백했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 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최후의 유언,뤼순 옥중에서, 1910년 3월 9,10일」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