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보
  • 가계도
  • 행적기
  • 관련인물
  • 1세~19세
  • 20대
  • 31세 (1909년 10월)
  • 31세 (1909년 11월)
  • 31세 (1909년 12월)
  • 32세 이후
  • 1879년9월 2일(음력 7월 16일)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 1881년여동생 성녀 출생.
  • 1884년안씨 일가 해주에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함.
    조부 안인수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음.
    동생 정근 출생.
  • 1889년동생 공근 출생.
  • 1892년조부 안인수 별세.
  • 1894년황해도 재령군 거주 향반 김홍섭의 딸 아려(17세)와 결혼함.
    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해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용맹을 떨침.
    부친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온 백범 김구와 상면함.
  • 1896년부친 안태훈, 동학당으로부터 빼앗은 군량미 문제로 천주교 종현(명동)성당으로 피신하였다가 청계동으로
    귀향함.
  • 1897년안중근을 비롯한 안태훈 일가가 홍석구 신부(J.Wilhelm, 빌렘)로부터 ‘도마(Thomas)’로 세례를 받음.
  • 1899년전 참판 김중환이 옹진 군민의 돈 5천 냥을 갈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총대로 선출됨.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 건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어 학습 단념.
    안중근 만인계 채표회사 사장 취임.
  • 1902년장녀 현생 출생.
  • 1905년안중근 부친과 상의하여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 산둥반도, 상해를 방문함.
    부친 안태훈 사망. 안중근 귀국. 장남 분도 출생(12세에 사망).
  • 1906년안중근 일가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주함.
  • 1907년서북학회에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함.
    석탄 광산사업을 위한 삼합회(한재호, 송병운과 동업)설립함.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목격하고 부상자들을 제중원(세브란스 병원)으로 입원시킴.
    2남 준생 출생.
    망명을 결심하고 부산-원산-청진-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김동억과 함께 도착함.
    간도 용정을 중심으로 동포들의 상황을 시찰하고 명동촌 선바위 부근에서 사격연습을 함.
    종성, 경흥을 거쳐 포시에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감.
    이곳에서 계동청년회에 가입하고 임시 사찰로 활약함.
    수청에서 안중근, 엄인섭, 김기룡과 결의 형제를 맺음.
  • 1908년「해조신문」에 「인심결합론」을 발표.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평의원으로 참가함.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실패.
    의병부대(총독 김두성, 대장 이범윤)중 최재형 부대 우영장으로 참가함.
    이강이 설립한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함.
  • 02.15일심회 발기
  • 03.02김기룡 등 11인과 단지동맹 결성.
  • 10.18이토가 일본을 출발하여 요동반도 대련항에 도착함.
  • 10.19안중근, 엔치야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이치권의 집에 머물면서 이토의 만주 방면시찰 소식을 들음.
  • 10.20대동공보사에서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함.
    거사자금 100원을 이석산(이진룡)으로부터 강제 차용함. 우덕순 동지와 이토 처단 계획을 합의함.
  • 10.218시30분발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남. 도중 포브라니치나야에서 한의사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를
    러시아어 통역으로 대동하고 10시 34분에 하얼빈으로 출발.
  • 10.22오전 9시 15분경 안중근 일행 하얼빈 역에 도착하여 유동하의 사돈 김성백의 집에 숙박함.
    이토는 뤼순을 거쳐 봉천(심양)에 도착.
  • 10.23안중근, 김성백 집에서 이토의 만주 방문 기사가 게재된 「원동보」를 읽음.
    오전에 이발을 하고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중국인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음. 김성옥 집에 유숙하던 조도선을 방문,
    정대호가 안중근 가족을 대동하고 하얼빈에 오는 것을 마중하기 워해 통역이 필요하다고 요청함.
    이날 저녁 안중근 거사자금 차용과 관련, 김성백에게 50원을 부탁하기 위해 유동하를 보냄.
    이때 유동하는 갚을 방법을 요구함. 이강에게 거사계획과 차용금을 갚아 달라는 편지를 안중근, 우덕순이 연명함.
  • 10.24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함께 우편열차를 타고 남행, 채가구(지야이지스고)역 도착.
    유동하에게 채가구 도착을 알리고 일이 있으면 전보를 치라고 타전함.
    유동하, 이튿날 아침 이토가 도착한다는 내용을 전보로 보냄. 안중근, 우덕순과 이토 저격 거사에 대해 논의함.
  • 10.25안중근, 채가구를 떠남.
  • 10.26안중근, 7시경 하얼빈 역 도착. 이토 일행, 9시 15분에 열차에서 하차.
    9시 30분 안중근, 러시아 의장대 사열 후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3발을 발사하여 모두 명중시킴.
    이때 러시아 군인이 덮치자 권총을 떨어뜨리고 “코레아 우라”를 세번 외침. 이토, 10시에 절명함.
    안중근, 하얼빈 역 구내에서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조사받음.
    러시아 당국, 11시 35분에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함.
    11시 55분 채가구에 있던 우덕순, 조도선 체포당함.
  • 10.27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안중근 재판을 관동도독부로 넘김.「대한매일신보」, 안중근 의거를 국내에 소개함.
  • 10.30일 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1회 심문.
  • 11.01안중근 외 9명 뤼순으로 출발.
  • 11.03안중근 외 9명 뤼순 감옥에 수감됨.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가 뤼순에 도착.
  • 11.04도쿄에서 이토 장례식이 거행됨.
  • 11.06안중근,「안중근 소회」제출.
  • 11.08일본 외상 고무라, 안중근에게 일본 형법 적용 지시.
  • 11.14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2회 심문.
  • 11.15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3회 심문.
  • 11.16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4회 심문.
  • 11.17미조부치 검사 유동하, 안중근 대질심문.
  • 11.18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5회 심문, 우덕순, 유동하 대질심문.
  • 11.19미조부치 검사, 안정근과 안공근 심문.
  • 11.22조선총독부 사카이 경시를 뤼순 감옥으로 파견하여 심문을 개시함.
  • 11.24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6회 심문. 안중근과 정대호 대질심문.
  • 11.26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7회 심문. 사카이 경시, 안중근 1회 심문.
  • 11.27사카이 경시, 안중근 2회 심문.
  • 11.29사카이 경시, 안중근 3회 심문.
  • 12.01사카이 경시, 안중근 4회 심문.
    미하이로프 변호사, 안중근과 면담하고 변호계 제출.
  • 12.02사카이 경시, 안중근 5회 심문.
  • 12.03사카이 경시, 안중근 6회 심문.
  • 12.04사카이 경시, 안중근 7회 심문.
  • 12.05사카이 경시, 안중근 8회 심문.
  • 12.06사카이 경시, 안중근 9회 심문.
  • 12.09사카이 경시, 안중근 10회 심문. 안중근과 유동하 대질심문.
  • 12.10사카이 경시, 안중근 11회 심문.
  • 12.11사카이 경시, 안중근 12회 심문.
  • 12.13안중근, 「안응칠 역사」기술 시작.
  • 12.16사카이 경시, 안정근과 안공근 심문.
  • 12.20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8회 심문.
  • 12.21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9회 심문.
    사카이 경시, 안중근 13회 심문.
  • 12.22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10회 심문.
  • 01.14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서 안유족구제공동회 개최됨.
  • 01.26미조부치 검사, 안중근 11회 심문.
  • 02.012월 1일 안병찬, 정근, 공근 형제가 함께 안중근을 면회함.
  • 02.062월 6일 사카이 경시, 안중근 신문 14회 심문.
  • 02.072월 7일 제 1회 공판.
  • 02.082월 8일 제 2회 공판.
  • 02.092월 9일 제 3회 공판. 더글러스 변호사, 야마토 호텔에서 재판의 부당성에 대한 기자회견 가짐.
  • 02.102월 10일 제 4회 공판. 미조부치 검사,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함.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 징역 1년6월이 구형됨.
  • 02.12제 5회 공판.
  • 02.13안명근, 뤼순 도착.
  • 02.14제 6회 공판, 안중근 사형 언도.
  • 02.15안중근, 안병찬을 통해 동포에게 유언을 알림.
  • 02.17안중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 면담함.
    동양평화론을 설파함.「동양평화론」집필을 시작함.
  • 03.07홍석구 신부, 뤼순에 도착.
  • 03.08흥신부, 안공근 등을 대동하고 안중근을 면회함.
  • 03.09흥신부, 두 번째 안중근 면회.
  • 03.10흥신부, 세 번째 안중근 면회. 종부성사를 청함.
  • 03.11신부, 마지막 안중근 면회.
  • 03.15안중근,「안응칠 역사」를 탈고함.
  • 03.24안중근, 유서 6통을 작성함.
  • 03.25안정근과 안공근이 미즈노, 가마타 두 변호사와 면담함.
  • 03.26안중근, 동양평화를 유언으로 남기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함.
    공동묘지에 묻힘. 안정근과 안공근이 안중근 유해 인도를 요구하나 감옥 당국으로부터 거부당함.
  • 03.28만주일일신문에서 안중근 공판기록을 발행함.
  • 04.02안중근 추모회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에 의해 개최됨.
  • 02.202월 20일부터 4회,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한인학교에서 안중근 연극이 상연됨.
  • 03.26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안중근 추도회가 개최됨.
  • 엔치야에서 안중근 연극이 상연됨.
  • 상해 한중호조사에서 안중근 연극이 상연됨.
  • 안중근을 다룬 정기탁 감독의 영화 애국혼 이 상해에서 상영됨.
  • 03.26안중근 순국 37주년 기념식이 서울운동장에서 10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거행됨.
조마리아(趙馬利亞) _ 안의사의 어머니안중근 어머니로서 뿐만이 아닌, 항일 독립활동가로서도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안중근어머니 조마리아는 국망의 위기에 즈음하여 안진사가 사망하고 안 의사가 국내외에서 구국활동을 할 때 아들을 지원하였으며, 안 의사가 사형된 뒤에는 가족들과 노령으로 망명하였고, 임시정부수립 후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항일구국운동의 어머니로서 굳건하게 살면서 사랑을 널리 배풀었다.
백범 김구(金九, 1876.7.2-1949.6.26) _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집안간의 관계가 대를 이어가며 지속될 만큼 깊었으며, 안중근 의거후 부인과 유족을 돌보아 주었다. 독립자사들의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명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10월에 송화군으로 강연을 나갔다가, 때마침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하고 난 직후였으므로 공모의 협의를 받아 다시 투옥되어 몇 달 후 해주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0.16-1909.10.26) _ 일본정치인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행사.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켰으며, 1909년 통감직을 사임,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 했지만 1909년 10월 26일에 만주순방중 하얼빈역에 내렸다가, 그날 오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조도선(曺道先, 1879-?) _ 독립운동가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포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의거성공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 10월, 조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마침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조국침략의 괴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갖고 우덕순, 유동하 등과 비밀리에 준비를 진행시키고 그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계획에 참여를 요청하자 적극적으로 동의 하였다.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은 2단계로 세워졌다. 즉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하고 그와 우덕순, 유동하는 열차의 교환지점인 채가구역 에서 대기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일행도 일제의 수색으로 역시 피체되었다. 그는 1910년 2월14일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유동하(劉東夏, 1892.1.5-1918) _ 독립운동가의거 당시 연락책임을 맡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도착할 예정임을 알려 암살에 기여하였다. 의거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 10월 노령 꼬트지포의 자택에서 부친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와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서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서명할 것을 요청하고 연서한 뒤 ’7인 동맹’을 조직 하였다고 한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는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하는 일자 1909년 10월 26일 아침임을 확인하여 동삼성 채가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에게 전보를 타전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 피체되어 1909년 11월 1일 안중근과 함께 여순감으로 이송되어 1910년 2월 14일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우덕순(禹德淳, 1879-1950.9.26) _ 독립운동가대한민국 정치인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의거 당시 동행하였으며 의거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협회 등 애국계몽단체 일원으로 활약했던 그는 1908년 여름 의병대의 참모중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 회령지방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 봄 노령 연추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이후 그는 안중근과 함께 공범자로 지목되어 러시아 헌병대에 피체되어 여순에서 재판을 받고 이듬해 2월에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안병찬(安秉瓚, 1854-1921) _ 독립운동가안중근의 공판 당시 무료로 변호하기로 하였으나 일제의 거부로 변호하지는 못했다. 이후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1919년 3.1일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청년단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여 총재로 선임되었으며 1919년 9월 일제에 채포되어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어 망명하여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1년 2월에 향로구에 남만주 독립운동의 통일기관을 설치했는데, 이 기관이 대한광복군이었고 이러한 대한광복군의 성립은 안병찬의 활동에 의거한 바가 매우 컸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최재형(崔才亨, 1860-1920) _ 독립운동가군수업으로 쌓은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하였으며, 안중근 의거후 그의 가족을 보호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 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이던 중 붙잡혀 살해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빌렘신부, 홍석구(洪錫九, 1860-1938) _ 안중근의 가족을 천주교로 입교, 세례를 주었다황해도 일대에서 선교활동 중 안태훈을 만나 청계동에 성당을 짓고 안의사 가족 전체를 유교에서 천주교 신자로 입교, 세례를 해주었다. 안의사로 하여금 개화사상과 민권의식을 갖게 했으며, 안의사가 사형언도를 받자 사형집행 전 여순감옥을 찾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내세를 기다리는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빌렘신부는 1909년 안의사 의거후 여순감옥에 수감 중 이듬해 안의사가 사형되기 전 안의사 성사를 집전했다 하여 2개월간 성무정지를 당하고 1914년 프랑스로 돌아와 1938년 선종했다.